
옛날에 긴막대기에 양쪽 끝에 똥통을 메달고 집집마다 똥을 푸는 사람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직업 때문에 함부로 대했고, 꼬맹이들은 놀리며 돌을 던지며 똥장군 똥장군 부르며 못되게 굴었다.
그 직업을 그때는 그렇게 똥장군이라 불렀다.
그런 그 사람이 늘 웃고 사람들이 아무리 함부로 대해도 화를 내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으며 아이들이 아무리 놀려도 웃으며 소리 지르지 않으며 밝게 살았다.
그런 사람에게 아버지만, 부를때도 그 사람 성씨에 선생이란 호칭을 넣어서 부르며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그 사람 성씨가 천씨인데 천선생이라 부르며
"마음이 고와서 자손중에 크게 벼슬을 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오"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사람 자손이 경찰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올랐다.
또 다른 이야기는 한번은 아버지께서 비닐 봉투 여러개를 곂쳐서 들고 오시는데 손가락이 비닐 봉투 무게 때문에 푹 파일 정도로 사들고 오셨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 무엇을 그리 많이 사 가지고 와?"
"일하시는 수고하시는 아주마이들 드시라고 사오는 것이야"
"새참 다 챙겨 주는데 뭐한다고 손가락이 파일 정도로 사 가지고 오는데"
나는 아버지 손가락이 푹 파인 모습을 보고 속상해 하니까
"괞찮아, 걱정 하지마"
하셨다.
가장 낮은 곳에 사람들을 향해서 귀하게 행동해 주시는 아버지의 대자비심을 세상 존재하는 단어로는 써내려갈 수가 없을 정도이다.
예전에 타지에서 온 아는 사람이 식당을 하고자 자리를 보아 달라고 했다.
그 식당 자리에 갔는데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 해준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그 집주인은 예전에 우편배달부였는데 현재의 인산가 자리가 처음에는 큰 도로에서 비포장길로 2km가 넘는 길이 험했었다.
그 날은 아버지께서 계셨는데 그 배달 하시는 분을 보시더니 신문 하나만 달랑 배달하기 위해 힘든길을 올라온 것을 보고 신문 시킨 사람 나오라고 하시더니
"이 신문 한 개를 가지고 읍에서부터 더욱이 큰길에서 이곳까지 길도 나쁜데 수고스럽게 해서 신문을 보고 싶은 너의 마음이 좋은 마음은 아니구나. 읍에 볼을 보러 갈때 가져다 보거라. 당장 신문 끊고 이분을 이렇게 고생 시키지 말거라"
하셔서 신문 하나를 매일 배달하던 고생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도 생각하면 얼마나 따뜻하시고
고마우신지 자주 생각이 난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때 만해도 인산가쪽 동네가 완전 시골이라 우편물도 많지 않았고 더욱이 읍내에서 인산가쪽까지 가는 거리가 차량으로 30분 가까이 되니 오토바이로는 더 긴 시간 이었다.
그런 대자비심을 느끼며 살았던 나는 전세계 복으로 1위이다.

옛날에 긴막대기에 양쪽 끝에 똥통을 메달고 집집마다 똥을 푸는 사람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직업 때문에 함부로 대했고, 꼬맹이들은 놀리며 돌을 던지며 똥장군 똥장군 부르며 못되게 굴었다.
그 직업을 그때는 그렇게 똥장군이라 불렀다.
그런 그 사람이 늘 웃고 사람들이 아무리 함부로 대해도 화를 내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으며 아이들이 아무리 놀려도 웃으며 소리 지르지 않으며 밝게 살았다.
그런 사람에게 아버지만, 부를때도 그 사람 성씨에 선생이란 호칭을 넣어서 부르며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그 사람 성씨가 천씨인데 천선생이라 부르며
"마음이 고와서 자손중에 크게 벼슬을 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오"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사람 자손이 경찰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올랐다.
또 다른 이야기는 한번은 아버지께서 비닐 봉투 여러개를 곂쳐서 들고 오시는데 손가락이 비닐 봉투 무게 때문에 푹 파일 정도로 사들고 오셨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 무엇을 그리 많이 사 가지고 와?"
"일하시는 수고하시는 아주마이들 드시라고 사오는 것이야"
"새참 다 챙겨 주는데 뭐한다고 손가락이 파일 정도로 사 가지고 오는데"
나는 아버지 손가락이 푹 파인 모습을 보고 속상해 하니까
"괞찮아, 걱정 하지마"
하셨다.
가장 낮은 곳에 사람들을 향해서 귀하게 행동해 주시는 아버지의 대자비심을 세상 존재하는 단어로는 써내려갈 수가 없을 정도이다.
예전에 타지에서 온 아는 사람이 식당을 하고자 자리를 보아 달라고 했다.
그 식당 자리에 갔는데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 해준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그 집주인은 예전에 우편배달부였는데 현재의 인산가 자리가 처음에는 큰 도로에서 비포장길로 2km가 넘는 길이 험했었다.
그 날은 아버지께서 계셨는데 그 배달 하시는 분을 보시더니 신문 하나만 달랑 배달하기 위해 힘든길을 올라온 것을 보고 신문 시킨 사람 나오라고 하시더니
"이 신문 한 개를 가지고 읍에서부터 더욱이 큰길에서 이곳까지 길도 나쁜데 수고스럽게 해서 신문을 보고 싶은 너의 마음이 좋은 마음은 아니구나. 읍에 볼을 보러 갈때 가져다 보거라. 당장 신문 끊고 이분을 이렇게 고생 시키지 말거라"
하셔서 신문 하나를 매일 배달하던 고생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도 생각하면 얼마나 따뜻하시고
고마우신지 자주 생각이 난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때 만해도 인산가쪽 동네가 완전 시골이라 우편물도 많지 않았고 더욱이 읍내에서 인산가쪽까지 가는 거리가 차량으로 30분 가까이 되니 오토바이로는 더 긴 시간 이었다.
그런 대자비심을 느끼며 살았던 나는 전세계 복으로 1위이다.